[칼럼]정죄당하는 차이, 차별
주변을 살펴보면 다양한 주체들 간의 조화, 협동, 공존, 상생의 가치들은 백안시되고 획일적 기준에 의한 배제와 차별이 난무한다. 다른 것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있다. 일치는 선이고 다양성은 혼란이다. 차이는 차별로 둔갑하기 일쑤이다. 개미와 베짱이, 현재와 미래, 일과 놀이는 각각 서로 대립하는 항수가 아니다. 오히려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누가 누구에게 속하고 어느 게 우선하고 나중되는, 더군다나 옳고 그름, 우열로 가름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짱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개미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일밖에 모르던 개미는 과로사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고, 일중독으로 가정을 등한히해 가정파탄이 날 수도 있다.
차이는 다름일 뿐이다. 사물의 존재양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서 차이는 늘 차별로 이어졌다. 주변을 살펴보면 용모가, 성이, 종교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은 예는 숱하게 많다. 20~30년 전 우리네 삶만 돌이켜보아도 도무지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를 잡아 죄다 짧게 깎아버렸던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은 애교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숱한 사람들을 쇠창살에 가두었던 시절, ‘차이’는 범죄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획일적인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는 차이를 이유로 차별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한다. 틀림을 피하기 위해 편을 짜고, 같은 편끼리는 생각도 행동도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다르면 바로 퇴출당하거나 왕따를 당하니 함부로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 차이는 약한 자에게 차별의 근거가 되지만, 강한 자에게는 우월성을 드러내는 증표가 된다. 그 차별의 감옥에 지금 성(性)이 단단히 갇혀 있다.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806041543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