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정죄당하는 차이, 차별

“여름 내내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만 불렀습니다. 개미는 ‘어쩌려고 저렇게 빈둥빈둥 놀기만 할까’ 걱정도 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두고 보자 하는 억한 심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되자 먹을 것이 없어진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개미가 퉁명스레 묻습니다. ‘내가 죽도록 땀 흘려 일할 때 너는 대체 무얼 했는데? 너같이 게으른 놈에겐 적선도 사치야!’ 문전박대를 당한 베짱이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추위와 배고픔 속에 죽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다. 어릴 적 이 우화를 접했을 때, 성실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의 대비가 공포스럽게 뇌리에 박혔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그런데 과연 개미는 부지런하고, 베짱이는 게으를까. 부지런히 일하는 것만 미덕이고 노는 것은 악덕인가. 베짱이의 노래는 노는 것일까. 그래서 베짱이도 개미처럼 살아야 옳을까. 아니다. 이는 애초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두 개체를 기계적으로 단순 비교한 데부터 엇나갔다. 정체성이 서로 다른 개체를 한쪽의 잣대로만 비교하니 엉뚱하게도 우열과 정오(正誤)로 나뉠 수밖에. 게다가 사실의 왜곡도 적지 않다. 실제 일하는 개미는 전체의 20~30% 남짓밖에 안 된다.

주변을 살펴보면 다양한 주체들 간의 조화, 협동, 공존, 상생의 가치들은 백안시되고 획일적 기준에 의한 배제와 차별이 난무한다. 다른 것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있다. 일치는 선이고 다양성은 혼란이다. 차이는 차별로 둔갑하기 일쑤이다. 개미와 베짱이, 현재와 미래, 일과 놀이는 각각 서로 대립하는 항수가 아니다. 오히려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다. 누가 누구에게 속하고 어느 게 우선하고 나중되는, 더군다나 옳고 그름, 우열로 가름되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짱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개미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일밖에 모르던 개미는 과로사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고, 일중독으로 가정을 등한히해 가정파탄이 날 수도 있다.

차이는 다름일 뿐이다. 사물의 존재양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서 차이는 늘 차별로 이어졌다. 주변을 살펴보면 용모가, 성이, 종교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은 예는 숱하게 많다. 20~30년 전 우리네 삶만 돌이켜보아도 도무지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머리를 길게 기른 남자를 잡아 죄다 짧게 깎아버렸던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은 애교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숱한 사람들을 쇠창살에 가두었던 시절, ‘차이’는 범죄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획일적인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는 차이를 이유로 차별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한다. 틀림을 피하기 위해 편을 짜고, 같은 편끼리는 생각도 행동도 같이 해야 한다고 여긴다. 다르면 바로 퇴출당하거나 왕따를 당하니 함부로 차이를 드러낼 수 없다. 차이는 약한 자에게 차별의 근거가 되지만, 강한 자에게는 우월성을 드러내는 증표가 된다. 그 차별의 감옥에 지금 성(性)이 단단히 갇혀 있다.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806041543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