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후의 교육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나치의 야만을 극복·청산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이후의 교육’을 주장했다. 나치 시대에 대한 사회 전체적 반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논의 과정에서 죄의식을 가진 인간, 부끄러움을 지닌 인간, 즉 새로운 인간형을 모색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반권위주의적 인간, 민주주의적 인간형을 길러내는 저항권 교육, 비판적 시민의식 형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쟁중독사회 헬조선에서 권력은 경쟁이라는 규율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 공정한 경쟁의 이름으로 억압이 정당화되었다. 박정희 시대 이후 학벌주의-입시몰입경쟁 교육 시스템이 억압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고 부역하는 인간형을 양산했다. 헬조선의 흙수저들은 그들이 지닌 권력과 부를 부러워하도록 최면에 걸린 삶을 살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자 되세요~”라는 이명박 시대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온갖 현란한 공약을 남발했지만, 그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만 부자의 길을 가고 말았다. 이명박의 집권은 단지 그가 거짓말을 잘하여 사람들을 잘 속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지금 이명박의 거짓말에 분노하는 우리도 사실은 그가 부추겼던 욕망에 선동당한 것 아닌가?
생존과 출세는 과거 친일독재 교육과 지금 학벌주의-입시몰입경쟁 교육이 추구하는 공통된 가치다.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비극적 효과는 획일성이다. 경쟁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을, 개성이 아니라 획일화를 강화시킨다. 초중고 학교교육은 맹목적인 경쟁교육에 갇혀 있으며, 취업지상주의의 대학교육에서는 비판의식이 실종된 상태다. 동일화·동일성 원리에 기초하는 경쟁교육은 본질적으로 규격화된 인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 교육과 일맥상통한다.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병영체제 학교 문화, 전두환 집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쟁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었다. 타자와의 경쟁에서 지고 이기는 것은 그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열등하거나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좋은 품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인성교육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새로운 시대의 인간형을 담기는 어렵다. 인성교육은 인권교육의 일부로 편재해야 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고 능력의 함양을 배제한 박근혜 시대의 인성교육은 일제와 유신체제, 군사독재하에서 일관되게 강조된 수신교육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비인간적 경쟁몰입교육에 더하여, 학습자에게 지배적 가치를 내면화시킴으로써 체제 순응형 인간 양성을 위한 길들이기 교육으로 교육주체를 파편화하고 소외를 전면화시킬 뿐 아니라 학습자의 가치체계를 황폐화시키고 획일화시킴으로써 역사의식의 형성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 교육도 아직 일제 이후, 해방 이후의 교육에 대한 합의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우리도 5·18 이후의 교육, 6월항쟁 이후의 교육, 세월호 이후의 교육, 이명박과 박근혜 이후의 교육을 성찰해야 할 때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같은 박근혜 정권 적폐 청산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한국 교육의 설계가 필요하다.
선거를 앞두고 자치단체들은 교육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기초선거에서도 교육 관련 공약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역사적, 교육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제 교육은 학부모, 교사, 학교, 교육청만의 몫이 아니다. 대학의 교양교육도 초중고 교육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그 영향을 받는다. 촛불혁명으로 중앙권력은 교체되었지만, 앞으로 냉전이 소멸된 새로운 한반도에서 교육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38089.html#csidx61b2b40c145ddd69ed7a4f0b202d7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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