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깨기가 5·18의 정신
‘도가니’ 깨기가 5·18의 정신
은우근
광주대 신방과 교수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는 광주인화학교에서 청각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구타와 성폭행을 다뤘다. 여기에서 지배자들의 끔찍한 인권유린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다. 학교의 지배자들과 경찰, 교육청, 시청, 심지어 교회까지 연결된 지역의 기득권 세력이 구축한 범죄 은폐의 시스템은 도가니로 상징된다.
대한항공 지배자 일가가 저지른 불법과 인권유린에 대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항의하는 상황은 도가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 뿐이랴. 삼성그룹의 노조 탄압에서 보는 도가니, 전 육군대장 박찬주 사건처럼 군에서 드러난 도가니, 최근 문제가 된 비리 사학의 지배자들과 교육부 간부가 유착하여 만든 도가니도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한반도에서도 거대한 도가니가 만들어졌다. 동북아 국제질서를 규정한 분단체제가 그것이다. 전승국들은 피억압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체제를 설정했다. 그 안에서 집단학살(제노사이드)과 인간성 유린을 정당화했다. 제주 4·3사건과 그에 이은 한국전쟁, 그 와중의 보도연맹사건, 양민학살을 상기해보라.
분단체제의 도가니는 독재 시대에 민중의 삶을 총체적으로 억압했다. 분단체제의 최대 수혜자, 도가니의 지배자인 독재자들은 수많은 간첩 조작과 북풍 공작으로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온갖 거짓으로 적색 공포를 조장해 도가니 안에 민중을 가두고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을 실현했다. 2018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렇듯 강고한 분단체제와 그를 떠받치는 세력이 붕괴할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5·18은 이 ‘도가니 체제’의 가장 극악한 관리자인 타락한 군부집단과 민중의 정면 대결이었다. 최정운 교수는 ‘폭력극장’과 ‘절대공동체’의 개념으로 당시 광주에서 만들어진 도가니 상황을 묘사했다. 전두환 일당은 5·18 이전에는, 일본의 내각 정보조사실(미국 CIA에 해당)의 첩보를 날조해 북의 남침 위협을 조작함으로써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명분을 만들었다. 또 북한 특수군 침투설 유포, 간첩 사건 조작 등의 수법을 활용했다. 그들은 광주를 분단체제라는 도가니 안의 고도(孤島)로 만들었다. 38년 만에야 터져 나오는 5월여성들의 미투는 5월민중이 겪은 참혹한 고통의 일부를 짐작케 한다.
맨주먹의 5월민중은 군사폭력으로 국가를 장악한 세력에게 처참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때 승리했고 위대한 공동체를 이룩했다. 장엄한 민중의 항쟁은 분단이 강요한 도가니의 폭력적 본질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없이 연약하게 보이는 민중이 한 덩어리로 뭉칠 때 억압의 도가니에 균열을 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세월호와 용산 철거민의 비극은 이런 도가니가 어떻게 다른 형태로 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촛불 이후 우리는 도가니 체제 지배자들의 거짓과 게으름과 부패와 교활함과 무능을 목도했다. 이 땅에는 깨어져야 할 도가니, 알려져 있지 않은 도가니가 많다. 그 지배자는 다양하며, 도가니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칠 때 받을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5·18 당시 시민 속에 침투한 감시자들 때문에 일부의 시민군들도 복면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가면은 도가니를 지배하는 권력과 그들이 구축한 감시와 처벌의 시스템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가면을 쓰고서 부정, 비리를 고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법원, 검찰, 경찰 등 모든 사법 분야 종사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촛불 이후 도가니들이 드러나고 있고, 그것들이 연쇄 붕괴를 일으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가니로 부터의 해방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옥죄고 있는 도가니의 실체를 깨닫고 그에 맞설 때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5·18 정신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38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