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성장주의와 능력주의, 추격주의에 의해 가속화되는 양극화는 정의를 향한 우리의 도덕감정마저 착란을 불러일으켜 약자를 규탄하고 강자를 두둔하게 한다.
혐오는 대개 증오와 경멸로 표출된다. 쇼펜하우어는 “증오는 가슴에서 나오고, 경멸은 머리에서 나온다”고 했다. 증오가 선험적 도덕감정의 발현이라면, 경멸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는 의미다. 권력관계 속에서 증오와 경멸의 발화 방향은 서로 다른 쪽을 향한다. 증오는 강자를 향하는 데 반해 경멸은 약자를 향한다. 증오는 경멸보다 더 공격적으로 표출되며 그 적대성은 대상의 부정, 소멸, 제거로까지 나아간다. 게다가 경멸은 도덕감정으로 인해 그 발현에 주저(躊躇)가 있게 되는 반면, 증오는 도덕감정으로 정당화된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지만, 무지(無知)야말로 폭력의 진앙지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먹고살기 급급한데 이웃의 형편을 살필 여력이 생길 리 없다. 살벌한 경쟁과 성과에 쫓기는 양극화 사회에서는 오직 고립된 ‘나’만 있을 뿐, 이웃이 자리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타자에 대한 무관심은 무지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무지는 편견과 오해의 요람이다. 편견과 오해가 내면의 불안과 공포와 결합하면 다른 것, 낯선 것, 싫은 것은 부정한 것, 틀린 것, 잘못된 것으로 쉽게 전환된다. 가짜뉴스가 발호하고 혐오가 싹트는 배경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증세를 보인다.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한다. 계층 상승 가능성이 봉쇄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할수록 누적되는 하층민의 우울증과 피해의식은 엉뚱하게도 기득권층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향해 날을 세운다. 사회적 스트레스를 약자 공격으로 배설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성공신화를 내면화함으로써 ‘성공한 자’, 또는 기득권층을 상상으로나마 자기동일화하게 되면 그 양상은 더 격렬해진다. 양극화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존재양태는 ‘열등감’ 또는 ‘우월감’으로 나타날 뿐이다. 열등감은 추격적 경쟁에 탈락한 사람들의 존재양태이고, 우월감은 경쟁과잉으로 인한 자기소진의 존재양태이다. 강자의 갑질이든 약자의 무력감이든 소외된 삶이긴 매일반이다.
이제 소외된 삶의 탈출구는 약자에 대한 도덕적 규탄과 공격에서 찾아진다. 약자에 대한 증오가 정당화되면서 사회적 약자 괴롭힘에 따르는 도덕적 망설임, 멈칫거림이 말끔히 소거됨은 물론 한층 집요하고 공격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약자 때문에 정의가 무너진다고 여긴다. 가해자는 당당하며 억울해하고 피해자가 염치없고 죄송한 형국이 벌어진다. 피해자가 문제 유발자가 되면서 ‘피해자 유책론’이 등장한다. 성장주의와 능력주의, 추격주의에 의해 가속화되는 양극화는 정의를 향한 우리의 도덕감정마저 착란을 불러일으켜 약자를 규탄하고 강자를 두둔하게 한다. 나는 이러한 도덕적 파산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신봉해온 ‘근대성’의 귀결이라고 본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소설가 구효서는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비극이 아닌 것을 추구해 왔습니다. 논리에 맞고 합리적이며, 삶의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것들만을 긍정적이라 생각했죠. 그러한 근대성이 이뤄온 역기능과 폐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비극의 발견이 있습니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810291524561&code=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