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평화의 새 시대


2000년 단군 이래 처음으로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던 때였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마중나온 남측 군 관계자들에게 냅다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순간 우리 측 군인들은 당황한 듯 경례도, 목례도, 눈인사도 아닌 엉거주춤 악수로 응대했다. 아주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인민군 위병대장은 거수경례와 함께 ‘대통령 각하’라는 최고 존칭을 힘차게 외쳤다. 만일 우리 군 장성이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 때 거수경례와 함께 ‘국무위원장 각하’라고 외쳤다면 어땠을까. 군인에게 경례란 충성의 표현인데, ‘반국가단체의 수괴’에게 군인이 할 짓이냐고 생난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김장수라는 자는 목을 빳빳이 치켜세운 채 김정일과 악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졸지에 ‘참군인의 표상’이 된 일도 있었다.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6·30 북·미 판문점 정상회담을 놓고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북핵문제에 운전자, 중재자, 촉진자라는 말은 다 필요 없다. 대한민국이 바로 당사자이고 주인”이라고 말했다. 어디서 익히 들어본 얘기인 것 같아 확인해보니, 지난 4월 12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조선 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제 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발언이었다. 게다가 황교안 대표는 “우리 스스로 안보와 국방을 챙기지 않는다면 북한의 통미전술과 미국의 자국우선 사이에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올 초 자유한국당 당대표 후보토론회에서 우리 군의 작전권 환수에 반대한다던 예의 입장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인민군대가 우리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를 외치고, 반북으로 먹고 살아온 야당의 원내대표가 김정은의 주장을 되풀이하는가 하면, 공안검사 출신 야당대표의 안보관이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작금의 한반도 상황의 변화가 그야말로 ‘사변적’ 변화임에 틀림없다. 이제 북·미수교로 양국관계가 정상화되면 한반도에서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의 힘의 균형은 이전의 양상과는 완전히 다른 새 판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북핵 폐기보다 북한의 국제사회로의 편입이 한반도 평화에 훨씬 더 위력적일 것으로 본다. 미국으로서는 북핵을 ‘동결’로 매듭짓고 한반도에서의 군사·경제적 전략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남는 장사일 수도 있다. 미 항모나 잠수함이 북한에 기항(寄港)한다고 상상해보라. 한 세기가 넘도록 외세에 기생해온 자들에겐 이 숨가쁜 대변전의 상황이 필경 공포와 공황으로 다가올 것이다. 노예의 삶에 길들여지면 구속이 평화이고 자유는 불안이며 해방은 공포로 느끼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