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인권 탈레반

세계인권선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인민들이 폭정과 억압에 견디다 못해 마지막 수단으로 반란에 호소하지 않게 하려면 인권이 평소 법의 지배에 의하여 보호됨이 필수적이며….’ 여기서 ‘폭정과 억압’의 장본인은 과연 누구고, 또 법을 통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일까. 법의 지배는 왜 인권보호에 필수적이라고 한 것일까. 이 물음은 인권 이해에 핵심적인 열쇳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폭정과 억압’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법치주의에서 지배의 주체가 누구고 지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따져 물은 적이 없다. 폭정과 억압일망정 그저 순종은 미덕이고 저항은 불순한 것으로 여겨왔다. 인권 주장은 기껏해야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불온한 주의주장일 순 있어도 ‘각 잡힌 세상’을 만드는 데는 하등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요컨대 인성은 ‘싸가지 있음’으로, 인권은 ‘싸가지 없음’으로 간주해온 것이다.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시민에게 공연히 권리에 한눈 팔지 말고 제 의무에나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게 모범국민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헌법은 국가로 하여금 주권자인 국민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명령하지만, 현실에선 거꾸로 국민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해야만 한다.

행정에서 ‘공공의 봉사자’(Public Servant)라는 본질적 사명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신 여러모로 ‘미욱하기 짝이 없는 민원인’(주권자가 아니다)을 나랏님의 선심과 재량으로 살피고 돌봐주는 게 최선인 양 여긴다. 인권 실현이 헌법적 실천의 핵심적 가치이기에 행정에 최우선적으로 최대한 고려되어야 함에도 정작 인권행정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늘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기껏해야 여러 의제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자신의 업적을 치장하는 소재로 인권을 호명하고 소비하는 행태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선출권력자들이 ‘왕년의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인권 감수성’으로 착각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인권에 관한 무지와 교만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인권의 가치에 앞서 ‘사회적 합의’(사실은 표의 손익계산서)가 우선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다. 

언제부턴가 ‘인권’, ‘성’, ‘다양성’이라는 용어가 포함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법률이나 조례들이 입법단계에서 줄줄이 퇴짜를 맞고 있다. 자기가 발의한 법률이나 조례를 스스로 철회하고 폐지하는 일까지도 벌어진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들에겐 인권 주장이란 대중의 정서는 무시한 채, 정치현실을 모른 채 원칙만을 강조하는 일종의 원리주의쯤으로나 간주된다. 인류사회가 합의한 보편적 가치가 이 땅에선 졸지에 사회통합을 해치는 ‘인권 탈레반’으로 낙인찍히고 마는 것이다.

2015년 11월 유엔 자유권협약위원회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정례심의에서 성소수자 차별금지와 관련해 “민감한 인권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인권은 여론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고 한 니겔 로드리 위원의 지적은 내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908091439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