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시민권과 디케의 행방불명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양손에 ‘칼’과 ‘천칭’을 들고 있다. 칼은 ‘과정의 공정성’을, 천칭은 ‘기회의 공평성’을 상징한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결합이 곧 ‘정의’라는 뜻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도 같은 얘기겠다. 정의실현은 국가의 핵심적인 사명이다. 시민혁명으로 확립된 시민권체제는 국가에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라’는 사명을 부여했다.

그러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내세우며 확립된 시민권체제는 실상 모든 인간이 아닌, 일정한 자격과 능력을 가진 인간만이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게 했다. ‘인간’과 ‘시민’의 분리가 시민권체제의 유전자로 새겨진 것이다. 국가는 과연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의를 실현하는가?

먼저 시민은 누구인지, 시민은 과연 보편적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지 되묻자. 제1차 인권혁명을 통해 제3신분인 ‘시민(Bourgeois)’은 당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제4신분(sans culottes)을 철저히 배제한 가운데 정치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파리코뮌의 실패는 ‘시민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엄성’이 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각성시킨 상징적 사건이다. 시민을 주권자로 선언한 국민국가는 출발부터 차별적이었던 셈이다. 영어 ‘시티즌(citizen)’의 어원인 라틴어 civis도 당시 노예를 배제한 자유민(自由民)만을 가리키지 않는가.

시민권이 평등을 저버리고 자유만을 강조해온 까닭은 애초부터 소유의 자유, 즉 재산권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시민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한 데 있다. 이는 오늘날 부의 편중과 세습, 양극화, 기울어진 운동장 등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로 귀결됐고, 이로써 기회의 공평성과 과정의 공정성은 사실상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세습신분제 사회의 부활’을 경고한 T. 피케티의 연구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로 정확히 증명된다. 이제 시민권 안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시민권 밖에서는 사회적 소수자가 양산되고 있다. 시민권 안팎에서 벌어지는 약자 차별과 소수자 배제는 곧 시민권의 자기부정이다. 이런 가운데 정의가 온전할 리 없다. 시민권체제에서 디케는 행방이 묘연해진지 오래다.

언제부터인가 시민, 시민사회, 시민운동이라는 말이 진보를 함의하는 보통명사로 통용되어 왔다. 한때 인민, 민중이라는 말도 회자되기는 했지만 결국 시민이라는 ‘온건한’ 용어만이 살아남았다. 반공주의가 내면화되면서 스스로의 사상적 검열을 피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교육이 공공재보다 사유재로 간주될 때, 학교가 민주시민 양성보다 입시 경쟁력을 중시할 때, 지하철노조의 파업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 투쟁한다고 비난할 때, 증세를 세금폭탄이라고 여길 때, 시민에게 인류 진보의 보편성은커녕 일찍이 혁명 동지를 배반하고 사적 이해를 공화주의로 분칠했던 바로 그 위선적인 시민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과 시민을 나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자신의 정체성과 달리할수록 부동산 광풍과 사교육과 갑질은 난무하게 마련이다. 당신은 어떤 시민인가.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