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말의 명징성과 삶의 책임성
“본 차로는 향후 버스전용차로로 운영되어지는 차로입니다.”
경기 파주 운정신도시엔 이같이 안내하는 도로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그런데 ‘운영되어지는’이라니? 저급한 외국어 직역문에서나 볼 수 있는 이중 피동을 썼다. ‘되다’도 아니고 ‘하다’도 아닌, ‘되어지다’라니. 우리말에 이런 표현은 없다. 도로표지판 같은 공공설치물에 대문짝만하게 게시될 문구라면 여러 사람들이 검토했을 것이다. 주무관이 기안을 했다면 사무관이 검토했을 것이고 서기관이나 담당과장, 국장, 시장의 순으로 결재했을 것이다. 의회의 승인도 받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 하나 우리말 용례에 어긋나는 저 이상한 문구를 바로 잡지 않았다.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관료의 기본교양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더 모호한 언어들이 난무한다. 그 대표적 사례로 “~같아요”가 있다. (날씨가, 기분이, 여행이, 바다가) 좋으면 좋았지, (날씨가, 기분이, 여행이, 바다가) ‘좋은 것 같아요’라니. 대체 이 무슨 개념 없고 무책임한 말인가. 자기 의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가뜩이나 살벌하고 험한 세상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까. 제 의견인데도 마치 평론가의 객관적인 논평인 양 너도나도 “~같아요”를 남발한다. 언론조차 “~라는 평가다”라는 식으로 주관을 객관으로 위장하면서 화자의 책임을 증발시킨다.
혹시 우리는 피동형 표현을 빌려 삶에 대한 자기 책임성을 은연중에 면피하고 있진 않은가. ‘운영할’이라는 말이 ‘운영될’이라는 말로 바뀌는 순간 행위자의 의지와 책임성은 무화되고 만다. 책임은 가공의 어떤 절대의지(구조/시스템)에 있을지언정 결코 특정인이 질 일이 아니다. ‘간다’가 ‘가게 된다’로, ‘생각한다’가 ‘생각된다’로, ‘느낀다’가 ‘느껴진다’로, 각각 능동이 피동으로 전환되는 순간 언어의 주인은 지워지고 행위의 주체성과 책임성도 제 길을 잃고 만다. 하물며 이중 피동인 다음에야.
‘생각한다’는 말이 ‘생각된다’는 피동태와 ‘생각되는 것 같아요’라는 모호한 표현을 넘어, 심지어 ‘생각되어지는 것 같아요’라는 정체불명의 언어로 변질되면서 세상을 향해 말하는 만큼 짊어져야 할 화자의 책임은 완전히 방면된다. 게다가 존재와 의식이 분리된 언어, 주어가 없는 말, 내 입을 빌렸지만 타자화된 언어가 자신의 언어인 양 착시가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나’와 ‘타자화된 나’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수시로 ‘타자화 된 나’가 ‘나’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허위의 나’가 나를 대신하는 착란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인데, 요즘 회자되는 가짜뉴스는 물론 종북, 독재, 좌파라는 말의 유통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삶과 언어가 분리되면 독립된 주체로서 존재하기는커녕 정체성의 해체를 맞게 된다. 그 결과 거짓된 위선이나 허황된 과대망상에 빠지거나 한낱 신앙의 노예로 전락되고 만다. 언어는 의식과 사고를 지배하면서 동시에 이를 반영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