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기후변화와 시민적 덕성

겨우내 실내온도를 20도에 맞추고 산 지 꽤 된다. 물론 춥다. 그러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가끔 방문하는 친지들이 “불 좀 때고 살아라” 하며 핀잔을 주곤 하지만, 이것은 근검절약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를 값싸게 맘껏 쓴다는 건 곧 현 세대에 대한 착취이자 미래세대의 몫까지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이 아직 에어컨을 집에 들이지 않고 버티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어컨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열기를 내 울타리 밖으로 뱉어낸다는 점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전기 에너지는 현세의 최고급 가공에너지 아닌가.

‘광화문 광장에 거대한 공기정화기를 설치한다’, ‘고등어를 굽지 말라’, ‘원전과 같은 청정에너지 생산비중을 더 늘려야 한다’는 따위의 높으신 분들의 고상한 처방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소시민적인 노력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런 알량한 소시민적인 노력조차 지켜나갈 자신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오래전 지문등록 거부로 주민증 없이 10여년을 버티다 결국 항복하고 말았던 그 굴욕적 기시감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과연 올 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을까.

‘24시간 총알배송’을 넘어 ‘새벽배송’으로 누리는 편리 뒤엔 철야노동을 감내해야만 하는 누군가의 수고가 숨어 있게 마련이고 ‘쌀값 안정’ 속엔 생산자 농민의 한숨이, 값싼 전기료의 뒤편엔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비는 구매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생산자의 노고가 있으므로 존재한다. 오늘날 ‘보이지 않는 손’은 노동이지, 시장의 자율이 아니다. 꼰대스럽다고 야유를 받을지언정 밥 한 알을 넘기면서도 농민의 수고를 기억해야 하고, 양말을 신으면서도 이것을 만든 노동자의 손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나의 소비가 타인의 노동 앞에서 겸손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 값이 개 값이 되고, 삶이 상품의 노예로 전락된다. 시장이 윤리를 등지고 편의만으로 치달을 때 자연과 사람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애덤 스미스가 왜 <국부론>에 앞서 <도덕감정론>을 강조하였겠는가.

원전은 세대 간 착취라는 점에서 더욱 악질적이다. 원전이 청정에너지라는 생각은 나의 풍요와 안락함의 대가를 미래세대에게 전가하겠다는 패륜적인 것이다. 내가 당장 궁핍하더라도 자식만큼은 보다 나은 세상에 살게 하고픈 게 부모 된 도리 아니겠나.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나의 편의를 위해 이웃을 저버리고 그것을 넘어 다음세대의 것을 탐욕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당대의 쓰레기를 후대에 넘기려 하고 있다.

오늘도 세상이 온통 뿌옇고 숨이 막힌다. 찬란한 햇볕과 싱그러운 대지, 녹색의 향연이 황홀한 봄날은 과연 살아생전에 다시 맞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미세먼지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민적 덕성이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다. 비록 소시민적 자구책일망정 나의 편의를 다만 조금씩이라도 접어야 한다. 내가 겪는 불편만큼 인류가 살고 다음세대가 산다. 각자도생 말고 같이 좀 살자.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