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의 눈]‘국가폭력의 대국민 반성문’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이 공표된 지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세계인권선언문은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라고 천명하면서 시작한다. 이는유엔의 9대 인권협약체계가 창설되는 데에 규범적 기초가 되었고 이를 통해 인권이 인류의 평화(안전보장이사회)와 번영(경제사회이사회)에 필수적인 대전제라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인권선언문을 살펴보면 모호한 구석이 발견된다. 인류가 인류에게 반성하고 선언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향해 인간 존엄성을 외치고 있는지,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가 누군지,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인 행위를 자행한 자의 실체가 무엇인지, 말하자면 인권침해를 야기한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고 있다. 과연 세계인권선언이 천명하는 권리의 주체(또는 피해자)는 누구고 책무자(또는 가해자)는 누구인가. 인류의 약속이라고? 그저 인류 모두가 “내 탓이오!” 하면서 서로 반성하고 착하게 살자는 얘기인가?
양차 세계대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무려 6000만명을 넘어선다. 민간인 희생자만도 3000만명이 넘는다. 그런데 가장 큰 피해자인 ‘인류’가 반성해야 할까. 사람들이 어느 날 일제히 테스토스테론이 치솟아 전쟁이 발발했다면 그게 맞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기도 하거니와 제국주의 국가의 패권적 경쟁에 무고한 인류가 희생된 게 바로 양차 대전 아닌가. 그런데 선언문은 아무리 뜯어봐도 피해자는 명확한데 가해자가 아리송하다. 대개 인권침해의 가해자들은 한결같이 “나도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이것의 확장 버전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니 아픈 과거, 자꾸 들쑤시지 말고 미래를 향해 마음을 모아 함께 나가자”고 둘러대는 것이다. 너도나도 모두 반성하자고 퉁친다. 가해를 은폐하고 피해는 실종시킨다.
양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고 인권침해를 한 당사자는 폭정과 억압을 일삼은 불의한 국가권력이다. 세계인권선언도 그 전문에서 “인민들이 폭정과 억압에 견디다 못해 마지막 수단으로써 반란에 호소하지 않게 하려면 인권이 평소에 법의 지배에 의하여 보호됨이 필수적”이라고 적시하지 않았는가. 인권은 우아하고 고상한 상황에서 태어난 게 아니다. 피 냄새 물씬 풍기는 학살과 고문, 투옥과 저항의 살벌한 역사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생활밀착형 인권’, ‘역지사지’ 따위로 인권을 탈정치화하는 것은 그래서 다분히 기만적이고, 그만큼 불온하다. “인권은 탄생 자체가 모든 형태의 억압권력에 저항하는 담론으로부터 출발했다.”(조효제 <인권의 문법>) 이제까지 세계인권선언을 흔히 ‘인류의 반성문’ 또는 ‘인류의 양심선언’이라고 일컬어왔다. 이는 정정되어야 마땅하다. ‘국가폭력의 대국민 반성문’으로.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